가볼만한 곳 용인 이영미술관

경부고속도로 수원 IC에서 나와 수원시내 방향으로, 영통 입구에서 고가 밑으로 50여m 가다보면 우측에 작은 이정표가 나온다. ‘이영미술관’(용인시 기흥읍 영덕리 221).
이정표를 따라 좁은 길을 들어서면 도심과는 사뭇 다른 정겨운 경치가 펼쳐진다. 시내 도로와 1㎞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미술관 주변은 조용하고 어찌 그런 전원의 냄새가 풍기는지, 야산과 어우러진 포근한 맛과 자연이 살아 숨쉬는 풍경은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8천여평의 드넓은 대지에 700평 규모로 자리잡은 이영미술관은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진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돼지 3천두를 길렀던 축사를 리모델링 했으니 여느 미술관처럼 ‘아트(Art)’적인 ‘필(Feel)’을 얻긴 힘들다. 하지만 주변 풍광과 어우러져 자연스런 분위기에 평온함을 느낀다.
미술관 외벽은 주위 풍경과 어울리도록 미백색으로 되어있고 지붕의 테두리나 입구의 문은 파랑, 주황 등의 원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곳은 돼지 축사가 멋진 미술관으로 변모한 곳으로 유명하다.
미술관은 제1·제2·제3·제4 전시실과 휴게실을 비롯해 식당, 작업실, 재료창고, 관리인숙소, 수장고, 연구실, 사무실 등 9개 동이 웬만한 국·공립 미술관이 부럽지않다. 외형뿐 아니라 미술관이 보유한 작품의 가치를 따지더라도 뒤지지 않는다.
이영(利瑛)미술관에는 두 명의 주인이 있다. 바로 남편이자 관장인 김이환씨(71)와 아내 신영숙씨(66) 부부로 20여년간 돈사였던 이 곳을 ‘미술작품보다 더 아름다운 미술관’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미술관의 이름 앞에 ‘이영’이란 낱말은 두 내외의 이름 가운데 자를 합친 것.
미술관은 준비기간만 10여년에 2001년 6월 오픈했다. 생계가 빠듯한 상황에서, 그것도 황혼의 나이에 들 무렵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셈이다. 그래서 미술관은 아늑하면서도 수준 높으며 한번 찾으면 푹 빠져 버리게 하는 매력을 지녔다.
개관 당시 전시작들은 모두 김 관장의 개인 소장품들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영미술관은 백화점 같은 미술관을 지양한다. 얼마 기간의 단위로 임대작을 내거는 것이 아니라 소장품으로, 즉 작품을 사들여 상설전시를 열고 있다. 보통 3개월 단위로 작품은 교체된다.
특히 이영미술관은 고(故) 내고 박생광 화백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박생광을 알고 싶으면 이영미술관을 찾아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
지난해 9월에는 두 달여간 ‘박생광 화백 탄생 100주년 특별전’을 열어 미술 관계자들의 호평과 함께 사설 미술관으로서는 드물게 수준 높은 전시를 열었다는 찬사를 받았다. 1977년부터 맺기 시작한 김 관장과 내고와의 인연이 이영미술관을 탄생시켰음을 감안하면 당연한 듯 보인다.
이영미술관은 내고와 더불어 두 명의 현역 화가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고있는 ‘추상미술의 대가’ 전혁림과 채색의 미를 가장 잘 살린다 평가받는 정상화가 그 주인공. 모두 ‘한국의 미’를 모태로 서양화에 몸담았다는 공통 분모를 지닌다.
지난 1월 초에는 전 화백의 따끈따끈한 새 작품이 들어와 제1 전시실에서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높이 3m, 길이 7m에 달하는 대형 화폭에 그려진 작품을 비롯해 2점이 새로 자리잡았으며 총 6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모두 파란색이 바탕이 된 그림들로 이국적 정취를 드러내면서도 한국의 정서를 닮았다.
제2 전시실에는 박생광, 전혁림, 정상화, 이경성, 김정, 이재삼, 홍재연 등의 작품이 걸려 있으며, 제3 전시실에서는 수묵의 미가 한껏 발산되는 동양화 30여점을 볼 수 있고, 제4 전시실에는 전혁림이 목기에 오브제를 결합한 입체적인 작품들이 돋보인다. 이쯤되면 짐작하겠지만 이영미술관은 어줍잖은 사설 미술관이 아니다. 명실공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몇 안되는 미술관이라 할만 하다.
제4 전시실 맨 안쪽에 위치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영미술관만의 또 다른 자랑거리가 나온다. 바로 자료실로 미술 관련 서적만 무려 4만여권이며 각종 물품들이 즐비하다. 신분만 확인되면 열람이 가능하다는게 김 관장의 설명.
이영미술관에서 또 하나 특이한 곳은 바로 매점이다. 여기엔 음료나 아이스크림, 간단한 요기 거리 등이 있는데 값을 치루는 계산원이 없다. 자율 매점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중앙에 놓인 칠판이 설명을 대신한다. 먹고 싶은대로 먹고 가격은 적혀 있는대로 탁자 위에 놓고 가라는 것.
누가 뭐래도 이영미술관의 최대 장점 중 하나는 넓직한 공간이 아닐까 싶다. 김관장이 수십년 심고 가꾼 나무들의 자태도 일품이며 잔디가 잘 자란 야외에 서있는 조각가 한용진씨의 ‘막돌 다섯’과 같은 작품들, 우리 고유의 전통 항아리를 이용해 만든 설치 미술 등이 자연과 잘 어우러져 있다.
하지만 이런 고즈넉한 감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듯 하다. 영덕~양재 간 고속도로 건설 부지에 이영미술관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올해안에 미술관을 다른 곳으로 이전해야 하는 상황. 그래서일까. 자신의 운명을 아는 듯 겨울에 찾은 이영미술관의 모습은 한편 쓸쓸해 보였다. 미술관 관람 문의 (031)213-8223.

■인터뷰/김이환 관장
“乃古와의 만남…내 인생에서의 기쁨”
대학원 졸업 후 스무해 넘은 공직생활과 함께 대기업에 봉직했던 김 관장은 나이 마흔셋에 내고 박생광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1985년 내고가 세상을 뜰 때까지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인연으로 김관장은 내고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내고의 집을 처음 찾아 갔을 때의 느낌이란… 지금도 뭉클합니다. 무어라고 딱히 꼬집을 순 없지만 작고 왜소한 몸집의 칠순을 넘긴 노인의 그림은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었죠. 그때부터 내고의 ‘인력(引力)’에 사로 잡혔습니다.”
김 관장은 평론가들이 ‘내고의 예술이 만개한 때’라고 일컫는 바로 그 시점의 인간 내고, 예술가 내고의 고뇌와 환희의 순간들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도했다.
“내고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내도 이야기 하지만 현재까지 10여년 세월을 그냥 덧없이 보냈을 거에요. 20여년간 축사로 쓰던 이곳을 1992년부터 나무도 새로 심고, 꽃도 심고 페인트 칠로 새단장을 하고…. 노년에 얻은 ‘진지한 재미’였습니다.”
그는 또 내고를 통해 연을 맺은 전혁림, 정상화 화백의 그림에도 비중을 두고 있다. 상설 전시 등은 이들이 그린 소장품을 중심으로 꾸며졌다. 뿐만 아니라 젊은 화가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데 근래 목탄을 이용한 회화작업을 하는 이재삼씨에게 작업공간을 제공해 주고있다.
“자랑같이 들릴 지 모르지만 이영미술관은 국내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미술관입니다. 죽은 내고가 숨쉬고 있어 그렇고 전혁림, 정상화 등 묵직한 화가와 신선한 젊은 화가가 공존하기에 그렇죠. 또 하나, 대부분 작품이 이영미술관 소장품입니다.”
이영미술관은 올해 지난해의 박생광 100주년 기념전에 이은 ‘포스트 박생광전’을 비롯, 아시아 근·현대 작가전 등을 준비하며 연말 불어닥칠 덧 없는 운명을 의미있게 만들어가고 있다.

■내고(乃古) 박생광 화백은…
올해는 고(故) 내고(乃古) 박생광 화백의 탄생 101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잘 생긴 것을 내 나라 옛것에서 찾아’ 한국 문화의 혼을 그렸던 화가이자 ‘한국화’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내고는 수묵화가 화단을 휩쓸던 시기에 독창적인 미감과 안목으로 민족에 내재된 원색적이고 화려한 색감을 치밀한 구도 속에서 끌어냈다. 뿐만 아니라 불교와 토속신앙,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민족혼과 문화적 자긍심을 불러일으킨 가장 한국적인 화가라 평가 받는다.
수묵화를 ‘동양화’라 일컬으며 ‘중국 위주의 동양 테두리’에 머물렀던 당대 주류 회화와는 달리 내고는 상대적으로 도외시 됐던 독창적 채색 전통과 양식을 연구한 것이다. 한때는 ‘일본적’이라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했으나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진 후 말년에는 화업이 만개하기에 이른다.
일본 유학 이후 1945년 귀국 뒤 1960년대까지는 ‘화조도’와 ‘진양 10경’ 등과 같은 향토색 짙은 작품을 그렸으며 독창적 세계가 활짝 핀 ‘무녀’, ‘토함산 일출’, ‘시왕도’ 등은 그 수준을 짐작케 한다. 말년에는 역사인물 대작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명성황후’, ‘전봉준’, 한국 현대불교의 거목 청담 스님을 담은 ‘청담 스님 영정’ 및 ‘청담 스님’, ‘청담 대종사’ 등 수 많은 작품을 남겼다.
내고는 임종에 이르기 전 “전통을 떠난 민족예술은 없다, 모든 민족예술은 그 민족 전통 위에 있다”라는 메모를 남겼을 정도로 확고한 민족의식을 갖고 살았다.

용인뉴스 webmaster@yongin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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