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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문화유적 탐방] 허균과 허씨 5문장 세장지

[경인신문=김신근 기자]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 일대는 양천 허씨가 입향하여 450년 이상 세거하고 있는 동족촌으로,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을 비롯한 그의 가족의 묘가 위치해 있다. 허균의 아버지 초당 허엽(許曄)과 큰형 허성(許筬), 작은형 허봉(許篈), 그리고 허균(許筠)의 자신의 묘와 여류 시인으로 당대를 풍미했던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들을 가리켜 ‘조선시대 허씨 5문장’이라 하였는데, 당대 최고의 뛰어난 문사(文士) 일문임을 칭송하는 표현이다. 

허엽 묘비(좌)와 신도비

아버지 허엽은 호가 초당(草堂)으로 경상도 관찰사까지 지냈다. 서경덕의 문인으로, 동ㆍ서인의 당쟁이 시작되면서 김효원과 함께 동인의 영수로 활동했다. 허엽의 묘표 앞면은 양사언, 뒷면은 한석봉 글씨이다. 특히 비석의 중간이 부러진 것을 이었는데, 이것은 아들 허균이 역모로 능지처참되자 아버지의 묘까지 그 화를 당한 것이다.

허성 묘비(좌)와 허난설헌 시비

허균의 큰형 허성은 예조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성리학과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뒤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며, 1590년(선조 23)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과 함께 서장관이 되어 정세 탐색을 위해 통신사의 알일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김성일이 왜가 침략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과는 달리 황윤길과 함께 왜는 분명 조선을 침략해 올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둘째형 허봉은 허균과 허난설헌을 가르칠 정도로 학문이 수준급에 달했던 인물이다. 당시 동인으로서 서인들과 대립하였고, 병조판서인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가 오히려 갑산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후 다시 기용되었으나 거절하고 금강산에 들어가 방랑 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쳤다.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은 조선의 대표적인 여류시인이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고 커서는 오빠(허봉)의 친구인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다.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어 신동이라고까지 했다. 15세에 김성립과 혼인했으나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못했다. 친정집에는 옥사(獄事)가 있었고 어린 딸과 아들마저 일찍 죽자 삶의 의욕을 잃고 시를 지으며 나날을 보내다가 27세로 요절했다. 시 213수를 남겼으며, 명나라 시인 주지번을 통해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발간되었다.

허균 묘비(좌)와 묘소

허균(1569~1618)은 조선 사회 절대 권위에 도전했던 대표적인 풍운아이자 이단아이며 비운의 천재였다. 26세에 벼슬길에 올라 황해도사, 삼척부사, 공주목사 등의 관직을 받았으나 번번이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유교의 테두리를 넘어 불교와 도교까지 이어지는 폭넓은 사상을 수용하였다. 그런 탓에 인간을 차별하지 않고 서자들을 포함한 소외 계층도 동등하게 인정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졌다. 그가 쓴 <홍길동전>은 일종의 평등사상을 제시한, 시대를 뛰어넘는 소설이라는 측면에서는 가히 혁명적이다. 1618년 역모를 꾀했다는 석연치 않은 죄목으로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허균 허씨오문장 묘역 입구

허균을 비롯한 허씨 5문장 묘역은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에 있다가 경부고속도로 준설 공사로 인하여 1968년 12월, 초당 허엽의 유허지인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입구에는 허엽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문은 노수신(盧守愼)이 짓고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썼다. 학계에서는 신도비의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아직 지방문화재로도 지정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자료제공 : 용인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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